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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14일
소름이 끼치는 문장을 쓰는 이들이 있다. 내용의 깊이를 넘어서 단어의 조합과 문체의 강약 조절만으로도 독자에게 지적 쾌감을 안긴다. 이는 내가 에세이나 나아가 비평집을 읽는 가장 큰 목적이다.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고종석의 문장은 내가 가장 따라하고 싶은 그것이다. 김훈은 다르다. 이 사람처럼 쓸 수 없다. 그는 정말 단어와 문장을 피로 쓰는 작가다. <자전거 여행>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미문이라고 여겼지만, 언론의 광분이 과찬이라 생각했다. <칼의 노래>를 읽고 압도당했다. 그런 문장은 처음이었다. 기름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비장미 넘치는 문장이었다. 이후 '시사저널'에서 그가 남긴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세계였다. 수사가 제한적인 전달에 목적을 둔 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문장들이었다. 기자의 글과 작가의 글의 장점을 공유하는 모범 답안이랄까.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역시 경외로운 문장의 성찬이었다. 책에 적힌 그의 생각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문장을 읽다보면,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와 같은 생각을 절로 품게 된다. 이게 바로 글의, 펜의 힘일 것이다. 김훈은 참 힘이 세다.
2009년 06월 07일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을 다시 꺼내 읽었다. 만약 이 작품이 예전에 발매되어, 십년 전에 읽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분명 현재 나의 감흥보다 더 큰 파장을 느꼈을 거다. 내가 지금도 감사하는 것 중의 하나는 초등학교 시절 <어린 왕자>와 <야간 비행>을 접한 것, 중학교 시절 <유리알 유희>와 <데미안>을 읽은 것,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 <젊은 날의 초상>과 <사람의 아들>을 만난 것이다. 그것은 당시 나를 조금 더 그 나이에 걸맞는 현명함을 갖추도록 이끌었으며, 지금의 나에게 큰 주춧돌이 되었다. 모든 책은 그에 부합하는 시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땅의 이십대 초반 모두에게 <네가 누구든...>을 추천한다. 젊기 때문에 이겨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진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젊기 때문에 진실에 항거하고 희망을 기약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소설이다. 또한 구성과 주제 의식 그리고 소재 등에서 독자의 집중력을 이끄는 지적 쾌감을 준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젊은 날의 초상>을 처음 읽었을 때,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란 무리였다. 내가 하고 싶고 듣고 싶은 그런 이야기가 온전히 담긴 작품인 덕분이다. <네가 누구든..> 역시 그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2009년 06월 04일
내가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반복해서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영화 세계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본 이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 알지만 서로 모르는 척하고 지내왔던 것들을 집어냈던 홍상수는 이제 너와 나의 치부를 들추는 대신, 그런 치부는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게 어떠냐고 충고한다. 그렇다. 위선과 오해가 없다면 우리가 타인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행동을 할 이유가 무엇에 있으랴. 본인이 아는 것만을 말하고 자신이 안다고 믿는 것이 다른 사람의 앎과 다를 수도 있음을 이해하는 것, 어쩌면 이는 홍상수 최초의 계몽 영화이다. 그의 맛깔나는 대사와 참으로 속물스럽게 그 대사를 소화하는 배우들의 열연 역시 돋보인다. 특히 빛나는 이는 고현정(고순 역)이다. 고순은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했고 그로 인해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고순의 끝맺음은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어른스럽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원인을 미화하지도 않으며, 상대에게 불필요한 미련을 안기지도 않는다. 정직하고 당당하나 무례하지 않다. 이토록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한국 영화에서 만난게 실로 오랜만이다. 그것도 홍상수의 영화에서라니. 나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나보다. 2009년 06월 01일
지난 목요일 밤에 스폰지하우스에서 <똥파리>를 보았다. 소문대로 '울컥'하게 하는 영화였다. 불행의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일상의 시름을 잊는다는 핑계로 술 마시고 폭력을 행사하며, 비참한 삶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물들은 관객에게 동정의 여지도 냉소의 여지도 안겨주질 않는다. 주인공 상현이 아버지를 사정없이 구타할 때, 연희가 아버지의 살해 시도를 피하고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오열할 때, 이 얽힌 실타래를 처음으로 돌이키겠다는 꿈은 일종의 사치가 된다. 정상적인 삶, 인사동을 구경하고 거리에서 악세서리를 사고 소박한 외식을 하는 그런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그들은, 나름대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 발걸음을 가로 막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저질렀던 행적의 반복이다. 상투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현과 연희가 흐느낄 때 이 영화를 또 인물을 그저 객관적으로 관망하며 평가하기란 매우 어렵다. 근래에 보기 드문 정서적 울림을 가진 영화이며, 신파의 힘은 세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영화가 끝나고 가슴이 먹먹하여 조금 걷다 보니 어느덧 서울역이었다.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에도 환하게 불이 밝혀진 이유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위치한 곳이었다. 대형 스크린에서 그분을 추모하는 영상이 상영되었다. 시민들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화면만 지켜보았다. 촛불을 든 이도, 주저 앉아서 보는 이도,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다. 그곳을 관할하는 전경들 역시 그들 옆에서 그저 영상을 바라 보았다. 삼십분 정도를 보다가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택시를 타기 싫어 부러 버스를 탔는데, 맥주를 들고 있는 승객은 나만이 아니었다. 맥주를 홀짝 거리며 집에 가는데 그 누구도 주정을 하지 않았다. 버스 기사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운전만을 할 뿐이었다.
2009년 05월 26일
원래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대한 리뷰를 쓰려고 했다. 대단히 좋은 영화다. 이변이 없는한,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될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는 것이 못내 어색하다. 내가 가장 열을 내며 적극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순간은 내가 지지하는 영화를 남들에게 이야기할 때인데, 근데 그게 지금은 참 어렵다. 나도 인식하지 못한 부채 의식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있었나보다.
돌이켜보면, 노무현이란 이름이 처음 각인된 것은 고종석의 책을 통해서였다. 이어지는 내용 2009년 05월 17일
그간 박찬욱의 영화에서 나를 매혹시킨 면은 순전히 시각적인 요소였다. 여느 한국 영화와는 다른 경지에 위치한 그의 세련된 미적 감각은 그간의 작품에서 동서양을 동시에 탄복시키는 시퀀스를 창조했다. 그 정점은 바로 <복수는 나의 것>이었다. 그것은 박찬욱 개인은 물론 당대 한국 영화의 최대치였다. 하지만 <박쥐>는 뭔가 다르다. 나는 처음으로 박찬욱의 스토리 텔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물론 박찬욱의 미장센과 몽타주는 더욱 원숙함을 과시하지만, 그것을 압도할만한 내용의 깊이가 이 작품엔 담겨 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최상급이다. 송강호는 역시 수동적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내지르는 연기에 있어서 그와 비견될 만한 배우들이 몇몇 존재하지만, 집어 삼키는 연기에서 그를 따라갈 한국 배우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전부터 주목해왔던 김옥빈은 드디어 그녀의 가능성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그녀는 앞으로 많은 감독들의 뮤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박찬욱의 최고작인 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의 <복수의 나의 것>을 너무 좋게 봤기에, <박쥐>를 한 번 정도 더 봐야 우열을 가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박쥐>에 대한 내 감동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이라면,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을 한국 영화에서 최고작 중 하나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2009년 05월 11일
오랜만에 전주를 찾았다. 정성일씨가 프로그래머를 맡았던 당시, 말 그대로 '캐열광' 하던 영화제였다. 당시 전주의 열악한 인프라는 영화를 사랑하는 이로서 감내해야 하는 고행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는 동행한 이들과 식도락의 목적도 합의했기에 그리 많은 영화를 보진 않았다. 이틀을 머물면서 두 편의 중단편 모음 영화와 한 편의 장편 영화를 관람했다.
<시네마스케이프 단편1> 총 여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영화이다. 그중 인상적인 작품은 세 편 정도였다. 레이놀드 레이놀즈의 <여섯개의 방>은 인류의 삶에 대한 경고와 동시에 공생을 향한 희망을 기원하는 작품이다. 주제 의식이 투영된 미장센 기법이 돋보였는데, 알고 보니 설치미술 등으로 탄탄한 내공을 기른 감독이더라. 드니 발뇌브의 <다음 층>도 인상적이었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인 이 작품은 인간의 탐욕과 그에 따른 말로를 경고한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작품이지만, 그 어떤 다큐멘터리 필름보다도 직설적이고 호소력있는 메시지를 지녔다. 제일 좋았던 작품은 역시 아오야마 신지의 <빨간 모자>이다. <유레카>의 나이브한 버전을 보는 듯한 이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복수극 - 혹은 복수를 준비하는 - 중 한 편이 될 것이다. 아오야마 신지는 항상 편하고 단순하게 자신의 생각을 관객에게 전달하지만, 그의 주제 의식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의 다음 장편 신작이 너무 기다려진다. <디지털 삼인삼색 2009: 어떤 방문> 가와세 나오미 감독에 대한 호평을 종종 들어와서 그녀의 작품 <코마>를 꽤나 기대했었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설득력이 부족했고, 스토리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깐느 심사위원 대상을 안겨준 <너를 보내는 숲>을 봐야지만 지금 내 판단이 정리될 듯 싶다. 하지만 이번 삼인삼색 시리즈는 홍상수의 <첩첩산중>만으로도 출중하다고 감히 자신한다. 홍상수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제 의식과 스타일을 반복하면서 그 미학적 완성도를 진화시키고 있는 정말 보기 드문 감독이다.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그간 (세 명 이상의) 앙상블 연기를 보기 힘들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첩첩산중>의 종반부에서는 네 명의 남녀 배우 -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 김진경 - 의 연기 호흡이 두드러진다. 갈등이 고조되고 결국 폭발하는 이 시퀀스는 정말 재미있다. 홍상수의 촌철살인 대사들은 더욱 맛깔나며, (본인의 의지가 어떤지는 몰라도) 점차 대중과의 교감대를 이뤄가고 있다. <페라고스토 런치> 지아니 디 그레고리오란 감독의 데뷔작인데, 비전문 노인 배우들과 함께 뛰어난 연기 앙상블을 선보인다. 배우들의 본인 성격이라 판단될 정도로 개성 있는 캐릭터를 선보이는데, 이게 묘하게 웃기면서도 서글프다. 그럭저럭 괜찮은 소품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2009년 04월 14일
언젠가부터 열심히 사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왜일까. 매사에 여유있는 듯한 '쿨'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까놓고 말해서 지금껏 열심히 산 적이 없었기에, 나는 원래 그런 놈이야,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걸까. 생각해보면 난 지는걸 싫어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다. 지면 지는 거고, 나쁜 일은 금방 잊는 편이다. 다만 이기는 것은 꽤 좋아했다. 하지만 이젠 그 기분도 예전만큼 짜릿하지 않다. 뭘까. 어른이 된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항상 다짐한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질투해서는 안 된다. 그들과 나를 분리하려고 애써서도 안 된다. 나도 한때는 그들이었고, 다시금 그들과 같은 선 안에 속해야 한다. 지는건 여러모로 불편하니깐. 싫고 좋고의 문제는 아니니깐. 그리고 근면은 중요한 미덕이니깐. 근면하게 산다는 것은 가치있는 삶이니깐. 그게 재미있는 인생인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재미를 위해 나의 현재를 털어낼 수 있을 지 어느새 십 년 동안 의문을 갖고 있다. 그렇게 하기엔 조금 멀리 온 것도 사실이고,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래야겠지.
2009년 04월 12일
예전에 부사장님을 포함한 팀원들과 함께 아저씨의 정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저씨를 어떻게 가를 수 있는지에 관하여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 군대를 다녀오는 것, 무얼 해도 능글맞게 보이는 것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와 청년을 가르는 기준은 낭만의 유무에 있다고 생각한다. 낭만을 잃어가며 남자는 점차 아저씨가 된다. 낭만이란 추상적 가치여서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나는 실용적이지 못한 가치 (금전적인 혜택을 기대할 수 없는) 를 동경하고 때로는 그것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는 마음가짐을 낭만이라 생각한다. 낭만이란 인생에서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닐 뿐더러 개인과 성공을 위해서는 오히려 없으니만 못한 존재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저씨의 삶을 택한다. 그 길을 걷지 않으면, 타인의 따가운 시선은 물론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을 외면하는 꼴이 될테니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른 정치인과 차별화된 이유는 바로 그의 낭만 덕분이다. 그를 가로막는 장벽에 정면으로 도전했고 불필요한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했다. 그는 대통령 선거 홍보 CF에서 그는 굵은 눈물 한 방울을 흘렸고 소탈한 모습으로 '상록수'를 노래했다. (물론 '대통령에게 낭만이 필요한가?' 는 이와는 다른 차원의 논의이다.) 이번에도 그는 오랜 친구인 정상문씨를 위해 자신의 과오를 미리 밝혔다고 한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용히 정상문씨가 책임을 뒤집어 썼다면 그에겐 아무 탈 없이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전히 낭만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속단하긴 이르지만, 최근 수사 내역을 보면 그 역시 한 명의 아저씨에 불과하지 않나 싶다. (한국의 '아저씨'를 싸잡아서 비난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낭만에서 비롯된 인간적 매력을 지닌 몇 안 되는 한국의 장년층 지도자가 이대로 그의 존재감의 일부를 잃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나 역시 낭만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으나, 그게 힘이 들까봐 그래서 스스로 내려놓는 순간이 올까봐 혹은 이미 어쩌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타협하고 있을지 몰라서 답답하다. 그리고 조금 속이 상한다.
2009년 03월 29일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어느 범주에 넣어야 좋을 지 모를 정도로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며 우리의 상식과 편견을 여지없이 비틀어낸다. 개인적으로는 말콤 글래드웰의 인사이트가 가장 빛이 났던 작품은 <티핑 포인트>라고 믿지만, <아웃라이어>는 그의 전작들과 detaling 측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글래드웰은 자신의 가설을 검증할 충분한 물적/인적 자원을 보유했을 것이며, 이는 저자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아웃라이어>에서 논하는 성공 이론은 본인의 작품에도 적용 가능하다. <티핑 포인트>를 저술하기 전의 글래드웰이였다면, <아웃라이어>를 이토록 훌륭하게 집필하긴 힘들었을 거다. <티핑 포인트>는 탁월한 인사이트에서 출발하여 그 인사이트를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 사례들로 이뤄진 책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자료 수집 및 분석에 필요한 수고는 크질 않았을 거다. 하지만 <아웃라이어>는 다르다. 이 책은 국경을 넘어선 방대한 실례 및 통계적인 분석으로 가득찼으며, 이러한 back up 들로 인해 글래드웰의 주장은 비로소 설득력을 갖는다. 사실 이 책에서의 글래드웰의 메시지는 <티핑 포인트>에서 만큼 창의적이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웃라이어>가 인상적인 까닭은 자신의 메시지를 입증하는 강렬한 증거들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많아지는 만큼, 그가 끼치는 지적 영향력도 넓어지고 있다. 그의 다음 행보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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