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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5월 08일
예쁜 옷이 좋다. 누가 나의 옷차림을 칭찬해주면 신이 난다. 어려 보인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진심이 희박한 말에도 연어를 낚아채는 어미곰 마냥 잽싸게 반색한다. 글도 그렇다. 아니 가장 유별나다. 지인에게 공개되는 것을 꺼려하면서도, 어찌 됐건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좋다는 말을 하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사소한 칭찬도 기억날 정도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내가 먼저 블로그를 타인에게 공개한 적이 한 번 있었다. 당시 교제하던 친구인데, 며칠이 지난 후에도 특별한 반응이 없기에 지나가는 말로 슬쩍 떠봤더니, 글이 많아서 읽지 않았단다.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허나 따져보면, 내가 행복을 느끼는 가장 귀한 수단이 작문과 패션 그리고 외모 관리는 정말로 아니다. 좋은 감독의 영화를 볼 때, 극도의 몰입을 가능케 하는 시와 소설을 읽을 때, 유명 피아니스트가 참여한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곡을 들을 때, 명랑 솔직하며 심지어 예쁜 여성과 시간을 보낼 때 가장 행복하다. 대화의 주제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 문학, 낭만주의 음악 혹은 미인이 거론되면 지치지 않고 떠든다. 그런데 타인이 이에 대한 나의 취향을 좋게 평가하면, 고맙기는 해도 크게 기쁘지는 않다. 이는 각기 추구한 동기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영화, 문학, 클래식, 미인에 대한 강력한 선호는 말 그대로 내가 좋아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무인도에 살았어도 지금만큼 좋아했을 거다. 반면, 옷을 잘 입고 어려 보이고 싶은 생각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희망의 발로였다. 옷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닌, 좋은 패션 감각으로 인식되고 싶은 마음이다. 인정하기 쉽진 않았지만, 글쓰기도 이와 다름없다. 이런 생각이 들고, 이곳에 글이 뜸하다. 이런게 한계 혹은 나라면 나다. 2012년 04월 22일
훗날 아이를 갖게 되면, 중성적인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활자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이름을 말이다. 아이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편견이란 어떤 이유에서건 옳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단, 발음이 예쁘고 따뜻한 의미를 가진 이름이어야 한다.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름을 가짐으로, 아이가 굳건한 자존감을 일찍부터 구축하길 바란다. 2012년 03월 28일
지난 일요일에 집 근처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성을 보았다. 도쿄에서 처음으로 말을 걸고 싶은 여자였다. 나도 모르게 오 분 정도를 따라갔다. 어느 건물로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대학교였다. 집 근처에 대학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기다렸다. 햇살도 좋았다. 가방에는 마침 두 권의 책이 있었는데, 그녀의 동태를 수시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짧은 호흡의 시집이 제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복을 택한 나도 또라이다 싶었지만, 대안이 없으니 어쨌든 읽었다. 그녀는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어차피 시집이란 100쪽을 겨우 넘길 분량이니, 완독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면 일어서리라 다짐했다. 시집의 후반에는 "세월에 대하여"가 있다. 예전에 나는, 활자로 인쇄된 "세월에 대하여"를 읽기 위해, 이성복의 시집을 샀던 것 같다. 기다림을 연장할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세월에 대하여"를 자꾸만 다시금 읽었다. 시간이 흘러 책장을 모두 넘기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데, 저 멀리서 하얀 종아리의 그녀가 보이더라. 인연이고 우연이고 뭐고 생각할 것도 없이, 무작정 뛰어가 말을 붙였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매력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영어에는 서툴러도 다행히 내 말은 알아 먹는 눈치였다. 근데 고등학생이다. 대학 탐방으로 왔다는데, 낸들 무얼 어쩌겠나. 멀어져 가는 그녀의 매끈한 각선미를 보며, 그저 '너는 나중에 정말 크게 될 년이야.'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2012년 03월 21일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상당수는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지진 발생 시 즉각적인 대피를 위한 휴대용 생필품 꾸러미도 인기라고 한다. 뭐랄까, 살고 싶어하는 그들의 욕망을 느꼈다. 적어도 의도하지 않은 죽음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보기 흉하지 않다. 사람답다. 그들의 소박한 항거가 말이다. 2011년 10월 15일
오랜만에 포스트를 남긴다. 거창한 아젠다로 글을 쓸 줄 알았는데, 고작 <리얼 스틸>의 관람기다. 삼십대로 접어가며, 대중 문화의 매력을 새삼 느낀다. 영화만 놓고 보면, 올해 본 할리우드 영화 중 열의 예일곱 편에 만족했다. 이는 <리얼 스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록키>, <트랜스포머>, <A.I.>의 미덕을 조금씩 갖는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뭉클했던 것은 살아 숨쉬는 권투에 대한 향수이다. 정말이지 권투를 참 좋아했다. 어린 시절, 어머님께서 유일하게 시험 전날 TV 시청을 허락했던 프로그램도 권투 중계였다. 지금은 물론, 유투브에서 전설적인 경기들을 찾아서 보는데 만족할 뿐이다. 그중 가장 자주 찾는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슈거 레이 레너드이다. 공중파 방송에서 상영한 (나아가 현재 동영상이 업로드된) 그의 전 경기를 반복해서 보았다. 그는 '완벽'이란 의미에 가장 근접한 복서였고, 주먹질의 우아함을 입증한 남다른 클래스의 사내였다. <리얼 스틸>의 복싱 컨설턴트가 바로 슈거 레이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슈거 레이의 플레이가 머리 속에 맴돌았다. 또한, 그 기억 속에는, 턱을 괴고, 그의 현란한 풋워크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관람했던 나의 유년 시절 기억도 함께였다. 2011년 02월 03일
보수 혹은 진보의 가치를 상징하고, 이에 따른 대중의 지지와 비판을 정면으로 받아 들이는 이들은 주로 정치인과 행정가이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과 가치관의 뿌리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은 각 진영의 선도적인 지식인들이고, 나아가 당근과 채찍을 통해 그러한 철학과 사회 의식을 내재화 / 통제하는 세력이 언론이다. 국내 최대 보수 정당은 한나라당이지만, 실상 한나라당의 재편 혹은 해체가 한국 보수 세력의 위기와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한나라당 그리고 유력한 보수 정치인을 대체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존재하면 족한 셈이다. 반면 조중동의 사회 / 경제적 위상을 한겨레, 경향, 오마이 등이 대채하면 어떻게 될까? 혹은 한국 보수 세력의 사상적 젖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박세일 교수가 어느날 절필을 선언하고 이념적 전향을 선언하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아마도 한국 사회는 근본적인 좌클릭 현상을 맞이할 것이다. 2011년 01월 30일
수작과 평작을 번갈아서 발표하는 감독들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중 다수는 종국에는 평작만을 (심하면 졸작을) 선보이는 그저 그런 2류 감독으로 전락한다. 그러한 원인은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첫째는, 자신이 재능과 그릇이 아직은 특정한 장르에 국한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섣불리 다른 장르로 진출하는 경우이다. 특히, 자신의 드림 프로젝트 어쩌고를 운운하며, SF / 서부극 / 호러 등 전통적인 뼈대를 갖추기 위한 어느 정도의 경험이 요구되는 장르에 도전하는 경우, 그중 열의 아홉은 평단과 관객의 외면을 받기 일쑤이다. 둘째는, 대규모 자본의 수혈에 따른 편익의 진짜배기 가치와 이와 동시에 감내해야 하는 리스크와 기회 비용의 의미를 면밀하게 산정하지 않고, 섣불리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그들의 통제를 직간접적으로 받으면서 점차 재능이 변색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거대 자본 유입을 가능케 했던 감독의 색깔은 아주 옅게 덧칠될 뿐이고, 실상 알맹이는 제작자와 투자자의 입맛에 부합하게 조리되어, 마치 패스트 푸드 업체의 스페셜 세트와 같은 영화만이 양산된다. 셋째는, 감독이 삶과 영화를 대하는 근본적인 가치관과 철학이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게 깜냥 이상의 지지를 받고 안주함으로써 발생한다. 이런 경우 감독들에게 일순간 쏠렸던 기대감의 원인에는 시류 / 영화 매체의 유행에 민첩하게 반응했던 그들의 감성적 촉수가 자리한다. 그러나, 시대 정신은 발빠르게 진화하고 영화 매체의 표현적 경계는 지속적으로 확장되기에, 감독이 근본적인 가치관과 영화 철학을 갖추지 못한다면, 결국 그들의 감성적 촉수는 한때의 유행과 사회 의식을 비교적 정교하게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그들의 영화 세계란 철 지난 유행과 감성의 늪에 빠진, 구태의연한 작품들을 내놓는 것으로 점칠될 뿐이다. 2010년 12월 26일
감동적이란 평은 많이 들었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사전 정보가 전무한 상태로 영화를 보았다. 포스터에서 환하게 웃고 계시던 그 분이 재연 배우가 아닌 이태석 신부님 본인인지도 몰랐다. 영화가 시작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자막이 등장할 때도 심드렁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까지 먹먹한 감동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울어본 기억이 또 있을까. 영화에 관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울지마, 톤즈>는 영화 그 자체만으로 대하기엔 무척이나 벅찬 작품이다. 얼마 전 인터뷰에서 읽은, "종교는 신앙이 아닌 보편적 윤리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현각 스님의 말씀에 크게 공감했다. 또한, 우리 사회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진실과 정의를 외면할 때, 중심을 잡아주시며 정의의 나침반을 진북으로 되돌려 주시는 도법 스님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에게서 종교의 숭고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태석 신부님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대하는 듯한 지극한 사랑을 주셨다. 신부님에게 이는 종교적 활동을 넘어선 보편적 윤리와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복한 노동이었다. 은혜로운 삶을 추구하는 모두에게 영화를 강권한다. 2010년 12월 16일
흡사 배트맨 비긴즈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배트맨이 유년 시절의 아픔을 이겨내고자 복수를 택했고, 이를 위해 그는 강해져야만 했다. 배트맨에게는 악인 퇴치와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거창한 사명감 보다는, 개인적 차원의 복수심이 그를 조종하는 동력이었다.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 중 가장 유머 감각이 부족한 그이지만, 배트맨에게서 유독 인간미가 느껴지는 까닭은 싸움의 의도와 그에 따른 파급 효과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는 괴리 때문일 거다. 배트맨 수준의 영웅인, 게다가 실존 인물이기까지 하는 존 레논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어머니에게 버림 받은 상처, 엄격한 이모의 집에서 자라며 느꼈던 억압감, 어머니와 이모 양자를 향한 애증의 교차, 그저 그런 삼류 인생으로 전락할 것 같은 불안감,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청소년 시절은 그의 자의식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러던 그가 어머니를 통해서 로큰롤을 접하고, 오합지졸 밴드를 조직하고, 서투르지만 갓 잡은 잉어처럼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공연을 해내고, 그리고 마침내 폴 메카트니라는 수줍은 그러나 대범한 음악적 목표를 지닌 또 다른 천재를 만난다. <노웨어보이>는 존 레논이 현실에서 동떨어진, 그리고 상당히 많은 이들로부터 우상화 되는데 일조한,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잘 설명해주는 텍스트다.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조악한 구석도 눈에 띄지만, 외면하기 어려운 감동의 순간이 몇 차례 찾아 온다. 설명하긴 어려우나 받아들일 수 밖에 영화의 미덕은, 그러한 감동이 대단한 명장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별 거 아닌 인사말과 합주 - 예를 들면, 폴과 존이 처음 만나 폴이 자신의 실력을 존에게 보여주며 밴드 합류를 요청하는 씬 - 등에서 느껴진다는 거다. 이러한 감동의 원천은 분명 음악도 영화도 아닌, 비틀스라는 밴드에게만 부여된 고유한 신화의 영역이다.
2010년 12월 13일
BCG에서 근무하며, 국내외 선도 제약회사를 대상으로 하는 몇 차례의 컨설팅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최고 경영진의 핵심 아젠다를 다룬 탓인지, 어느덧 나도 완연한 자본가의 모자를 쓰고 제약 시장을 바라본게 사실이다. 따라서 보다 균형 잡힌 사고를 위해, 비판적 시각에서 제약 업계를 논하는 저서들을 몇 권 찾아 보았다. <제약회사는 어떻게 거대한 공룡이 되었는가>는 풍부한 자본력을 발휘하여 국가의 보건의료 체계에 이기주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형 제약 업체 및 유관 공무원을 질타하는 책이다. 특히, 보건적 관점이 아닌 상업적 관점에 가까운 잣대로 행해지는 작금의 시판 허가 제도에 큰 우려를 표한다. 또한, 과거의 R&D 중심 사업 모델에서 점차 영업 / 마케팅 중심 사업 모델로 변질되며, 궁극적으로 환자 후생과 무관한 영역에 과다 비용이 지출되는 현재의 value chain 상의 맹점을 개탄한다. 작가는 주로 영국과 미국을 거론하고 있지만, 이러한 현실은 한국에도 적용된다. 더군다나 국내 제약 업계의 고질병인 me too 제네릭 중심의 사업 모델 그리고 리베이트라는 검은 유혹은 국민 건강을 담보 삼은 인질극이나 마찬가지다. 인프라나 인력의 질적 측면에서는 세계 선도 수준에 가까운 부분도 일부 존재하지만, 국내 헬스케어 시장에는 아직 개선되야 하는 다수의 영역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지향점에는 가능한 저비용 구조로 국민 모두의 건강을 효율적으로 도모하는 제도 정립이 자리한다. 허나, 헬스케어 / 금융 등과 같은 정부 규제 산업에서 컨설팅과 같은 기업 중심의 경영 자문이 창출 가능한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내가 여러 제약 조건에도 불구,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일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