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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5월 11일
오랜만에 전주를 찾았다. 정성일씨가 프로그래머를 맡았던 당시, 말 그대로 '캐열광' 하던 영화제였다. 당시 전주의 열악한 인프라는 영화를 사랑하는 이로서 감내해야 하는 고행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는 동행한 이들과 식도락의 목적도 합의했기에 그리 많은 영화를 보진 않았다. 이틀을 머물면서 두 편의 중단편 모음 영화와 한 편의 장편 영화를 관람했다.
<시네마스케이프 단편1> 총 여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영화이다. 그중 인상적인 작품은 세 편 정도였다. 레이놀드 레이놀즈의 <여섯개의 방>은 인류의 삶에 대한 경고와 동시에 공생을 향한 희망을 기원하는 작품이다. 주제 의식이 투영된 미장센 기법이 돋보였는데, 알고 보니 설치미술 등으로 탄탄한 내공을 기른 감독이더라. 드니 발뇌브의 <다음 층>도 인상적이었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인 이 작품은 인간의 탐욕과 그에 따른 말로를 경고한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작품이지만, 그 어떤 다큐멘터리 필름보다도 직설적이고 호소력있는 메시지를 지녔다. 제일 좋았던 작품은 역시 아오야마 신지의 <빨간 모자>이다. <유레카>의 나이브한 버전을 보는 듯한 이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복수극 - 혹은 복수를 준비하는 - 중 한 편이 될 것이다. 아오야마 신지는 항상 편하고 단순하게 자신의 생각을 관객에게 전달하지만, 그의 주제 의식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의 다음 장편 신작이 너무 기다려진다. <디지털 삼인삼색 2009: 어떤 방문> 가와세 나오미 감독에 대한 호평을 종종 들어와서 그녀의 작품 <코마>를 꽤나 기대했었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설득력이 부족했고, 스토리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깐느 심사위원 대상을 안겨준 <너를 보내는 숲>을 봐야지만 지금 내 판단이 정리될 듯 싶다. 하지만 이번 삼인삼색 시리즈는 홍상수의 <첩첩산중>만으로도 출중하다고 감히 자신한다. 홍상수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제 의식과 스타일을 반복하면서 그 미학적 완성도를 진화시키고 있는 정말 보기 드문 감독이다.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그간 (세 명 이상의) 앙상블 연기를 보기 힘들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첩첩산중>의 종반부에서는 네 명의 남녀 배우 -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 김진경 - 의 연기 호흡이 두드러진다. 갈등이 고조되고 결국 폭발하는 이 시퀀스는 정말 재미있다. 홍상수의 촌철살인 대사들은 더욱 맛깔나며, (본인의 의지가 어떤지는 몰라도) 점차 대중과의 교감대를 이뤄가고 있다. <페라고스토 런치> 지아니 디 그레고리오란 감독의 데뷔작인데, 비전문 노인 배우들과 함께 뛰어난 연기 앙상블을 선보인다. 배우들의 본인 성격이라 판단될 정도로 개성 있는 캐릭터를 선보이는데, 이게 묘하게 웃기면서도 서글프다. 그럭저럭 괜찮은 소품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